삼국시대~현재까지 박물관의 역사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역대 왕들은 동물원 식물원의 개념의 공간을 만들어 향락을 즐겨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집과 보관의 기능을 중심으로 본다면, 신라 진평왕 43년에 신라가 당나라에 파견한 사절단에 대한 답례로 당 황제가 답례서와 함께 병풍과 비단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성덕왕 32년에는 중국 황제가 신라왕에게 보낸 선물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말 가운데 ‘사람에게 보여 모두가 경탄했다’는 내용을 미루어 수집과 보관의 형태의 박물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제 진사왕 7년에는 궁실을 중수하여 못을 파고 동산을 갖추어 진기한 짐승과 식물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고, 동성왕 32년에도 침류각을 궁궐 동쪽에 일으켜 못을 파고 동산을 갖추어 기금이 홰를 길렀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예들은 초기 단계의 수집 기능을 하는 건물이나 보관 시설을 갖추고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기도 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경주 안압지에서 호랑이 뼈, 곰의 뼈, 조경석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인위적인 동물원 식물원이 만들어졌음을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그 강력한 국력이 집약된 곳으로 사기에는 문무왕 조에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사가 보인다. 1975~1976년에 조사되었는데, 고대 정원의 원형이라고 할 이 유적지는 동물의 우리와 동물에게 물을 먹인 통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동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화봉사(宣和奉使)고려도경(高麗圖經) 궁전조(宮殿條)를 보면 ‘고려시대에는 궁궐 안의 장화전(長和殿) 행랑에 보물을 보관하였다’고 전해지며, ‘태평정(太平亭)에는 태자의 편액을 걸고 명화이과(名花異果)와 진완지물(珍玩之物)을 나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종 19년에는 진완서화(珍玩書畫)를 수집하고 20년에는 진기한 물건들을 진열했으며, 장화전(長和殿)은 나라의 보물을 저장하고 경비를 엄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예종 16년에는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淸燕閣)에 서화를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역시 예종 16년에 ‘송나라에서 보내온 서화를 선시(宣示)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선시(宣示)’라는 용어를 사용해 진열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박물관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07년 고종 황제 양위로 경운궁에서 즉위한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11월 6일 동물원·식물원·박물관이 본격적으로 설립 추진되었다. 더불어 1908년 9월에는 어원사무국을 설치하고 고려자기를 비롯한 불교 공예품, 조선왕조 회화 등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1909년 3월 퇴위한 고종이 덕수궁(경운궁)에 고관대작과 외국 사신들이 선물한 진귀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석조전을 건립시켰는데, 1933년 이 석조전에서 근대 일본 미술품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이때 고궁에서의 일본 미술품 전시가 문제시되자 우리나라의 고미술품도 전시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1936년 8월 새로운 미술관 건물의 건설에 착수하여 1938년 3월에 준공되면서 창경궁 내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에서 삼국시대 이래의 조각, 공예품, 도자, 회화, 그리고 조선 출토 중국 도자기 등 미술품만을 골라 이관하고 이 왕가 미술관을 발족시켰다. 이때 소장품은 11,000점 내외이며 이 건물은 8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강당 등을 갖추어 우리나라 미술관의 효시라 할 만하다.
1910년대에 박물관을 살펴보면 경주 시민에 의해 출발한 ‘경주 신라회’는 1913년 ‘경주 고적보존회’로 정식 발족하고, 경주시 동부동에 있던 옛 객사 건물을 이용하여 전시관을 개설하고 신라 문물을 전시하여 박물관의 기능을 시작하였다. 1921년 가을 우연히 금관이 출토되어 그 고분을 금관총이라 명명하였는데,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제 유물이 드러나면서 경주는 국내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금관총 조사를 계기로 경주 시민은 금관로를 지어 보존과 전시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하고 서울로의 반출을 금지하였다. 1926년에는 총독부 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1925년에는 당시 일본 왕이 성혼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과학박물관 건립에 착수하여 왜 성대에 있던 총독부 청사가 새 청사로 옮기자, 그 자리에 과학박물관을 세워 1927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부여에서는 1929년 ‘부여 고적보존회’가 발족하면서 백제관을 유물 전시관으로 사용하다가 1939년 역시 총독부 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1934년에는 공주에서 ‘공주 고적보존회’가 발족하여 1940년 옛 관아인 선화당을 공주 읍 박물관으로 만들고, ‘공주 사적 현창회’에서 이를 운영하였다. 또 개성과 평양에서도 1931년과 1933년에 각각 부림 박물관이 세워져, 개성박물관에서는 고려시대 유물을 중심으로, 평양박물관에서는 고구려와 낙랑시대를 중심으로 전시 개관되었다.
국립박물관 외에 사립박물관 미술관의 형성을 살펴보면 일제 식민정책 아래에서도 간송 전형필은 일찍부터 민족문화 재의 수집가로 활약하며 서화·고서 수집에서 시작하여 도자기·불상 등 각 분야에 걸쳐 방대한 문화유산을 수집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에는 성북동 선잠단에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을 세우고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여건이 여의찮아 상설 전시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71년 10월 겸재준을 1회로 하여 현재까지 특별기획전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해마다 봄, 가을에 〈간송문화(澗松文華)〉 지를 발간하여 우리나라 근대 박물관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국립박물관의 형성을 살펴보면 1945년 광복과 함께 경복궁 내 건물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출발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경주 부여에 소개했던 유물을 복귀시켰다. 그러다가 정부 수립을 맞이하여 새로운 박물관 사업으로서 궤도에 오를 즈음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중에도 경주 등지에서는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전시 기능은 열악한 상황이었으나 조사·연구 활동은 지속되었다.
전쟁 기간에는 부산으로 대피하였다가 1951년부터 광주, 부여, 공주에 3개 분관을 개관하여 정상적인 운영을 재개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에는 다시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나 경복궁 철수 명령으로 인해 남산으로 이전하고 구청사를 구황길 재산 사무총국에 이관하였다. 1954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을 수리하여 이전하였고, 1955년 2월에 공식적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1968년 7월 국립박물관이 문교부 관할에서 문화공보부 관할로 편입되고, 1969년 이왕가박물관과 이 왕가미술관이 국립박물관으로 통합 이전되었다.
1972년에는 경복궁 내의 새 건물로 이전 개관하였다가, 1986년에는 옛 중앙청 건물로 이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산하에 7개의 지방 박물관을 갖추고 역사·미술·민속 분야로 본격적인 박물관 활동을 시작하며 수집, 보존, 조사·연구, 전시, 교육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1997년 옛 중앙청 건물이 국책에 따라 철거되자 경복궁 내의 임시 건물로 다시 6차 이전하였고, 1997년 옛 중앙청 자리에 자리 잡게 되고, 2005년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신축 이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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